내 명함엔 ‘겸임교수’, 내 연구실은 없다
오늘도 강의 전, 카페가 내 연구실이 된다.
학교에서의 하루 일정은 학교에 도착해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오늘 수업에 필요한 자료들을 체크한다. 노트북, 충전기, PPT, USB, 그리고 학생들 과제물까지. 큰 가방 하나에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 연구실이 있다면 미리 준비해 둘 수 있는 것들이지만, 나는 매번 집에서 가져와야 한다.
강의 시작 전, 오늘 수업 내용을 한 번 더 점검하고 PPT를 수정할 곳이 없는지 또한번 읽어본다. 때로는 동료 교수님의 연구실 앞에서 잠시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바쁘신데 죄송하다"는 말을 달고 살게 된다.
강의 시작 5분 전, 강의실 앞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학생의 인사를 받고 나도 인사하며 책상에 앉는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고, 프로젝터 연결을 확인하고, PPT 파일을 다시 한번 열어본다. PPT연결이 잘 되는지, 데이터는 잘 보이는지를 체크할 때 이것저것 부산스러운 내 모습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강의가 끝나면 빠르게 정리하고 강의실을 나선다. 학생들의 추가 질문이 있으면 복도에서 대답하거나, 빈 강의실을 하나 더 찾아서 성심성의껏 충분히 이해시키며 대답해준다.
점심시간에는 맛있는거 먹고 싶을 땐 학교 밖으로 나가서 먹고 싶은 메뉴를 주문하고, 귀찮으면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신다. 때로는 학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다.
그리고 오후 강의가 끝나면 집으로 바로 가는 날도 있고, 프리랜서로 진행하는 다른 프로젝트가 있는 날에는 또 다른 일터로 향한다.
연구실이 없다는 것이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만의 장점들을 발견했다. 우선 시간과 공간의 자유도가 높다.
정해진 연구실에 매일 출근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고, 기분전환이나 영감이 필요할 때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작업하기도 한다.
다양한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디자인 작업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카페에서 작업하다 우연히 들은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지하철에서 본 광고 디자인에서 수업 소재를 찾기도 한다.
고정된 공간에 갇히지 않아서 오히려 더 넓은 세상을 교실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불편한 점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자료와 장비 보관이다. 무거운 디자인 관련 서적들, 학생들 작품 샘플, 프리젠테이션 관련 서류 등을 항상 집과 학교를 오가며 들고 다녀야 한다. 어깨가 아픈 건 이미 일상이 되었다.
집에 와서 샤워할 때 어깨를 보면 빨갛게 띠가 둘러져 있다.
나를 좋아해주는 학생들의 질문도, 진지한 상담도 연구실이 있는 정규직 교수님들은 학생들이 편하게 찾아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나는 항상 임시 공간을 찾아야 한다. 빈 강의실, 카페, 때로는 복도에서 이루어지는 상담은 집중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교수님들과 연구실에서 자연스럽게 소통하고,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며 학과 일을 논의할 때 같이 참석은 하지만 학과의 일원이면서도 완전히 속해있지 않은 애매한 위치랄까. 연구실이 없다는 것은 때로 묘한 고립감을 준다.
이런 상황은 비단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겸임교수와 정규 교수 간의 근무 환경 차이는 제도적인 현실을 반영한다. 정규직 교수들은 연구실, 연구비, 안정적인 근무 환경을 보장받지만, 겸임교수는 학교와 강의실을 오가는 "보따리장수"이다.
학기 시작할 때 가끔 신입생들이 나에게 묻는다. "교수님 연구실이 몇 호실인가요?" 그때마다 나는 잠시 멈칫한다. 시각디자인과 겸임교수인 나에게는 연구실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내' 연구실이 없다.
그러나 겸임교수로 지내며 느끼는 것은, 사실 교육이라는 본질적 가치 앞에서는 연구실의 유무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지식과 경험이 있고, 그것을 나누는 시간 자체가 의미 있다면, 그 공간이 연구실이든 강의실이든 카페든 상관없지 않을까. 오히려 다양한 공간에서의 경험들이 더 입체적이고 실무적인 시각디자인 교육을 가능하게 한다. 학생들에게 "디자인은 어디서든 할 수 있다"라고 가르치는 나 자신이 그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고정된 공간에 의존하지 않고도 교육할 수 있다는 자신감,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학생들과 더 가까운 거리에서 소통할 수 있는 친밀함까지. 어쩌면 내 연구실은, 내가 머무는 모든 공간일지도 모른다. 집에서 수업을 준비하는 책상, 학교 카페에서 학생과 나누는 대화, 차 안에서 떠올리는 아이디어들까지. 물리적인 공간은 없지만, 교육에 대한 열정과 디자인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진 무형의 연구실이 항상 나와 함께 이동하고 있다.
연구실이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 경험이 나를 더 유연하고 창의적인 교육자로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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