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보다 먼저 꺼내야 하는 것, 감정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건 스킬이 아니다.
툴은 하루 이틀이면 익힐 수 있고, 기능은 유튜브나 AI도 알려준다.
하지만 아무리 툴을 잘 다뤄도 ‘무엇을’ 표현할지 모르면 디자인은 움직이지 않는다.
의미 없이 예쁜 것만 추구하게 되고, 감정 없는 껍데기만 남는다.
그래서 나는 디자인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묻는다.
“지금 너는 무슨 감정을 표현하고 싶니?”
학생들은 당황한다. 감정을 표현하라는 말이 아니라 디자인을 배우고 싶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한다.
“디자인은 결국 감정의 시각화야.
표현하고 싶은 감정이 명확하면, 그 형태는 반드시 따라온다.”
나는 디자인을 기술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각은, 반드시 어떤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브랜드이든, 공간이든, 캐릭터이든, 결국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에 대한 감정적 질문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걸 모르거나, 알면서도 어려워한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창피하거나 틀리면 어쩌지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색채 디자인 수업할 때 “자신의 기억나는 감정을 색으로 표현해보라”고 했더니, 한 학생이 회색과 보라를 섞은 배경에 흐릿한 원형을 배치한 작업을 제출했다.
작업 자체는 단순했고, 완성도도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데 설명을 요청하자 그 학생이 조용히 말했다.
“이건 제가 고등학생 때 겪었던 상실감이에요. 정확히 설명은 못 하겠지만, 그때는 감정이 뭉개져 있었어요.”
그 말에 나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디자인적 측면에서 완성도가 부족했던 그 작업은, 그날 수업에서 가장 강렬한 울림을 줬다.
왜냐하면 그 디자인 안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진짜 감정’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나는 확신했다.
학생이 감정을 꺼내지 않으면, 디자인은 진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
먼저,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질문을 던졌다.
"네가 평소에 반복해서 떠올리는 장면은 뭐야?"
"사람들이 너를 어떤 색으로 기억하면 좋겠니?"
"디자인이 아니라 일기 쓰듯, 지금 이 순간을 표현해본다면?"
처음엔 어색하고, 느리다.
답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학생도 많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작은 변화의 씨앗이 움트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감정을 꺼낸다는 건 기술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한 번 감정을 시각 언어로 표현하는 걸 경험한 학생은 그다음부터 확실히 달라진다.
말수가 적던 학생이 색에 집착하게 되고,
항상 비슷한 구도만 고수하던 학생이 파격적인 구성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제작하는 스킬보다 감정이 앞서면, 작업에 ‘의미’가 붙고,
의미가 붙은 디자인은 결과물을 넘어 ‘메시지’를 갖게 된다.
그 순간부터 학생은 더 이상 기술자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시각화할 줄 아는 창작자가 된다.
나는 그 지점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늘 ‘어떻게 잘 만들었는가’보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가’를 묻는다.
디자인 수업은 결국 질문의 수업이다.
학생들이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 안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질문.
그 질문이 쌓이면, 언젠가 하나의 감정이 뚜렷한 색으로 튀어나온다.
그 순간을 나는 지금까지 수십 번 봐왔고, 그때마다 교수로서의 존재 이유를 다시 느낀다.
디자인은 기능이 아니라 감정이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항상..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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