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은 모른다, 자기 안에 얼마나 빛나는 게 있는지
가끔 나는 학생들의 조용한 얼굴을 오래 바라본다. 말이 적고, 눈빛도 무덤덤하며, 자신이 만든 결과물에 별다른 자부심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한 학생들. ‘그냥 과제를 했을 뿐이에요.’라는 표정을 짓는 그들에게서 나는 늘 미처 인식하지 못한 잠재력의 그림자를 본다.
그림자처럼 조용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은, 종종 그들보다 내가 먼저 발견하게 된다.
학생들은 대개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감각을 가졌는지 모른다.
모른다기보다는,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왔고, 그것을 들여다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다.
주입식 수업, 정답 중심 평가, 오답을 부끄러워하는 문화 속에서 그들은 “생각하는 것”보다 “정답을 말하는 것”에 길들여졌다.
그래서 어떤 학생은 자신의 감정을 디자인에 녹이는 법을 몰라 하고,
어떤 학생은 자신이 만든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는 법조차 두려워한다.
나는 이런 학생들에게 “답을 알려주는 교수”가 아니라, “스스로 끌어내게 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누군가의 정답을 따라 그리는 디자인은 결국 감정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그 아이가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지’,
‘그것이 본인과 어떤 연결을 가지는지’를 스스로 표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가끔은 수업 시간 내내 학생이 만든 디자인에 대해 내가 질문만 하고, 그 학생은 말 한마디 없이 머뭇거리기만 한다.
하지만 그 ‘머뭇거림’조차 의미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건 지금껏 누구도 그에게 “너의 생각은 뭐야?”라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다.
늘 조용하고 존재감이 없었던 아이였는데, 어느 날 캐릭터 수업에서 '자신의 성격을 동물로 표현해보라'는 과제를 냈더니, 약이 바짝오른 고양이를 주제로 한 캐릭터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지만, 내가 몇 차례 질문을 유도하자,
그 학생은 조심스럽게 “자꾸 피하고 싶고, 하지만 날카로워지기도 해요”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그 아이가 자신의 내면을 디자인 언어로 연결한 첫 경험을 했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나는 교수로서 어떤 확신을 느낀다.
아, 이 아이는 지금, 자기가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체감하고 있구나.한발한발 가면된다.
그 감각을 한 번 경험한 아이는 이전과 달라진다.
그 후 그 학생은 자발적으로 캐릭터의 배경 이야기를 더 그려오고,
색채 선택도 감정 중심으로 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그 아이가 “나도 말할 수 있어요”라고 느낀 것 자체다.
천천히 그걸 끄집어내는 일이야말로 겸임교수인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육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겸임교수라는 위치는 솔직히 말하면 늘 한계와 긴장의 연속이다.
학생을 매 학기 새롭게 만나야 하고,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야 하며,
교육제도를 바꾸거나 환경을 구축할 권한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자리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학생들의 성적보다 태도에 더 집중한다.
정답보다 감정, 결과보다 표현에 집중한다.
학생은 자기 안의 능력을 모른다.
그리고 그걸 가장 먼저 알아채는 사람은 종종 담담하게 수업을 지켜보는 교수다.
나는 그걸 본다. 그리고 묻는다.
“이건 왜 이렇게 만들었니?”
“네가 진짜 표현하고 싶은 건 뭐야?”
“이건 네 이야기니?”
나는 지금도 매 수업마다 이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그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발견하길 바라면서.
지금은 눈빛이 조용하고, 말이 없고, 주저하는 그 아이도 언젠가 자기만의 빛을 꺼내게 될 거라는 걸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변화의 출발점이, 내가 건넨 질문 하나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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